슈베르트 – 소외된 나에서 진정한 나로 나아가는 여정 구름마저 녹여 버릴 듯한, 뜨거운 태양에 눈이 부신 날이다. 그러나 햇빛의 강렬함과는 대조적으로 입꼬리도 눈매도 한껏 처져있는 모습이 어디선가 꼭 소나기를 만난 듯한 청년이 들어온다. 인사를 나누고는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말없이 들이켰다. 얼음 하나를 입에 물고 녹을 때까지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 감정의 평정을 찾고자 노력 중인 듯 보였다. 그에겐 몇 년간 사귄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결혼을 생각하며 진지한 만남을 이어갔으나 여자친구와 그녀의 부모님 마음은 달랐다고 한다. 아직 안정된 직장이 없었던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고 그녀 또한 결혼까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그의 마음을 거절했다. 그의 간절한 마음을 나누며 함께 들었던 곡은 슈베르트 Franz Peter Schubert <겨울 나그네> Die Winterreise D. 911이다. <겨울 나그네>는 슈베르트의 대표적인 연가곡으로 1827년 그의 나이 30세에 뮐러의 시에 곡을 붙인 24개 노래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에 실패한 청년이 추운 겨울 연인의 집 앞에서 이별을 고하고 정처 없는 방랑의
반주: 공동 창작과 해석을 통한 예술적 소통 ※ “리허설이 시작되기 전, 이미 연주는 시작된다” 연주는 무대 위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반주자에게 있어 진짜 연주는 리허설이 시작되기 훨씬 전, 상대 연주자와 처음 만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다. 무대 뒤에서의 준비, 리허설 전의 감각, 짧은 대화 한마디. 이것들이 모여 반주자의 전문성을 말해준다. 이번 칼럼에서는 리허설을 앞둔 반주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전 준비와 리허설 운영의 핵심 팁을 소개한다. 리허설 전, 반주자의 준비 포인트 3가지 1. 나만의 언어로 악보 마킹하기 전문 반주자들은 악보를 '읽는 것'이 아니라 '사용'한다. 솔리스트들의 호흡 포인트, 흔들릴 수 있는 템포, 클라이맥스 전의 감정적 지점 등을 미리 파악하고, 자신만 이해할 수 있는 기호와 색깔로 마킹해두자. 이러한 마킹은 연습실에서의 긴장을 줄여주고, 리허설 중 예상치 못한 상황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게 해준다. 2. 연주자에 대한 사전 리서치 같이 연주할 파트너가 누구인지, 과거 어떤 스타일의 연주를 해왔는지, 선호하는 템포나 감정선은 어떤지를 미리 조사해보자. 특히 성악가의 경우 언어별 강점, 딕션 스타일, 특정 구간에서의 감
페르난도 소르 – 서로 다름을 안아주는 연습 따스한 햇볕이 여름의 문을 열 듯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햇빛이 강렬하지만, 건물 뒤에 드리운 그늘은 서늘함을 머금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일상에서 오는 서로 다른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는 듯하다. 40대로 보이는 아름다운 커플과의 만남으로 하루를 열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들은, 다름으로 인한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했다. 남자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랐고, 여자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랐다. 함께 살면서 연애할 때와는 다른 모습이 보이고, 서로에게 요구하는 것 또한 너무나 다르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결혼 전에는 나에게 없는 모습과 성향이 강렬한 이끌림이었지만, 이제는 다름으로 인해 불편하고 어색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 것 같다고 한다. 서로 다른 곳을 향해있던 두 사람의 시선을 한곳에 모은 곡이 있다. 그 곡은 페르난도 소르 Fernando Sor <위안> L` Encouragement Op. 34이다. 이 곡은 ‘기타의 베토벤’이라 불리는 뛰어난 작곡가이자 기타 연주자인 소르(1778-1839)의
지아코모 마이어베어 – 배신의 아픔이 아닌 베품의 따뜻함 얼굴이 잔뜩 찌푸려진 젊은 직장인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들어온다. 이쁜 얼굴에 그늘이 가득한 그녀가 무슨 일인지 궁금했는데 먼저 말을 건넨다. “내 마음 같지 않네요! 세상 사는 게 왜 이리 힘든지….”라며 본인의 고민과 마음이 상한 이유를 전한다. 40대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고등학교 시절 친구 Y를 만났는데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고 한다. 본인이 일하는 직장에 자리를 알아봐 주고 함께 일하게 되었다. 처음 직장생활에 어려움이 크던 Y에게 많은 도움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탓인지, Y의 회사생활은 무리 없이 수년이 이어질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어느 날 상사에게서 승진의 기회가 있는 프로젝트 이야기를 전해 들은 Y는 별도의 상의도 없이 혼자서 진행한 것이다. 상사는 당연히 Y가 친구인 저랑 함께 할 거로 생각하고 말을 건넸지만, 금시초문이었다. 살짝 배신감이 들어 사실을 확인했더니, Y는 단독으로 진행할 의사를 보였다. 고등학교 때에도 함께 지내는 친구 없이 늘 혼자인 그녀인지라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느껴진 친구였다고 한다. 그런 친구가 자신의 뒤통수를 친 느낌이 들어
AI 시대의 음악 직업 재편: 음악가의 역할은 어떻게 진화하는가? 인공지능의 도입은 음악 산업의 제작 구조와 유통 경로뿐 아니라, 음악가의 존재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과거에는 작곡가, 연주자, 프로듀서, 엔지니어가 각기 고유한 역할을 수행하던 구조였다면, 오늘날 AI는 이들의 역할을 부분적으로 대체하거나 재정의하고 있다. AI 작곡 도구의 보급은 전통적인 작곡가의 역할을 변화시키고 있다. 반복적이거나 기계적인 작업을 AI가 맡으면서, 음악가는 창의의 방향을 설정하고 감성적 선택을 내리는 감독자이자 큐레이터로서의 역할을 강화하고 있다. 마스터링, 믹싱 등의 기술적 영역에서도 AI의 자동화 기능은 일부 엔지니어의 수요를 감소시킬 수 있지만, 반대로 AI를 조율하고 교정하는 전문가, 즉, AI 활용형 제작자(AI-informed producer)라는 새로운 직군이 부상하고 있다. 또한, 비전문 음악가도 접근 가능한 창작 환경이 열리면서, 음악을 ‘직업’으로 삼지 않던 일반 대중이 창작자-소비자(Prosumer)로 편입되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는 음악 노동의 경계를 허물고, 창작의 민주화를 확대하는 동시에 기존 직업인에게는 정체성의 재구성
차이코프스키 – 이별을 위한 위로 가까운 이의 상실로 인해 우울함이 심하다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전화가 연결되었다. 사회에서 만났지만 자매 이상으로 가깝게 지낸 친구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일 년 전 사별한 남편과 금술이 너무 좋아 그의 빈자리에 슬픔이 컸던 친구가 겨우 일상을 회복하자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치료를 받던 중 세상을 떠난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 한 켠이 텅 빈 것 같다는 공허함에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았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뭘 해도 즐겁지 않다는 그녀, 우울한 기분이 들 때는 무언가를 하려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는 것도 좋을듯하다. 서둘러 빠져나오려는 노력보다는 이럴 때 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기회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한다. 그녀와 함께 듣게 된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우울한 세레나데> Sérénade mélancolique Op. 26이다.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그의 첫 작품으로 1875년 차이코프스키가 35세 때 작곡하여 레오폴드 아우어에게 헌정한 곡이나 초연은 아돌프 브로드스키가 했다. 그는 아우어가 공연하는 것을 보고 ‘훌륭한 표현력, 사려 깊은 기교, 시적인 해석’이라며
반주: 공동 창작과 해석을 통한 예술적 소통 ※ 연주현장에서 빛나는 반주자의 실전 생존 팁 “무대 위, 순간의 판단력이 곧 실력이다.” 1. 무대에 올라가기 전 : 리허설의 ‘기준’을 만든다 리허설은 곧 ‘지도’다. 무대에서 혼란을 막으려면 리허설 때 ‘변수’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 리허설은 템포, 숨쉬는 지점, 프레이징, 악보 넘김까지. ‘연주’가 아니라 ‘디테일 점검’의 시간이다. 개인적인 연주는 혼자 있을 때 하는것이고, 리허설을 할 때에는 이미 본인의 실력이 준비가 되어서 상대방 연주자와 ‘맞춰보는’ 시간인 것이다. 말로 풀지 말고, 손으로 확인하라! "여기 rit 조금만 해주세요"라는 말보다, 직접 연주하며 상대가 듣고 느끼게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말보단 음악으로 대화하는게 좋다. 2. 연주 직전 : 악보보다 ‘예상’을 챙겨라 페이지를 넘길 때 ‘순간 기억’을 해야한다. 악보를 넘길 때 마지막 마디의 화성과 코드를 어느정도는 머릿속으로 살짝 외운 후에 넘겨야 음악이 끊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갈 수 있다. 또한 즉석 문제 해결 능력을 준비해야한다. 솔리스트가 실수를 했을 때, 반주자가 해줄 수 있는 건? 흔들리지 않는 템포, 다음 진입 타이
반주: 공동 창작과 해석을 통한 예술적 소통 ※ 반주, 두 얼굴의 예술: 성악과 악기 반주의 접근법 차이 반주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게 되는 고민이 있다. “성악 반주와 악기 반주, 뭐가 더 어려워요?” “그냥 맞추면 되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반주를 깊이 경험한 사람이라면 안다. 이 둘은 곡의 외형만 다른 것이 아니라, 음악을 대하는 방식부터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 차이를 알 때 비로소, 반주는 ‘단순한 협연’이 아닌 독자적인 예술로 완성된다. 1. 성악 반주 – ‘언어’와 ‘호흡’을 연주하는 예술 성악 반주는 단순히 피아노가 노래를 받쳐주는 구조가 아니다. 가사, 텍스트, 문장, 숨, 발음, 감정의 결 – 그 모든 것을 음악으로 번역해주는 통역자 역할을 한다. ◇ 텍스트 우위 성악 반주는 무엇보다 ‘가사’가 중심이다. 같은 멜로디라도 단어의 강세, 발음 위치, 문장의 맥락에 따라 다르게 연주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독일가곡의 경우, 단어 안의 강세에 따라 프레이징이 바뀌기도 한다. ◇ 호흡 중심의 템포 성악가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호흡에 따라 템포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자연스럽다. 반주자는 이를 ‘무너짐’이 아니라 ‘표현’으로 이해하
보로딘 – 아내를 위한 사랑의 선율 갑작스러운 소나기와 큰 울림의 천둥소리에 놀라 가슴을 쓸어내리던 중 한 통의 전화가 울린다. 바로 상담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는 중년남성의 목소리가 간절하게 떨렸다. 그의 아내가 자궁암이라며….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이는 듯했다.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의 초등학교 선생님인 아내는 날마다 즐거운 사람이었죠. 그런데 건강검진 받은 후 암이라는 말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게 이런 거구나”라며 그날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운동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과도 잘 어울려 평생 몸도 마음도 건강할 것만 같았던 아내가 수술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그동안 남편으로서 나는 어땠나? 뒤돌아보니 잘한 것이 하나도 없더라’라고 한다. “아내가 음악을 좋아하는데, 함께 들으며 이야기 나눌 만한 곡이 없을까요?” 그분에게 권해드린 곡은 보로딘(BORODIN) 현악 4중주 2번 D장조 (String Quartet No. 2 in D major) 3악장이다. 작곡가 알렉산드르 보로딘(1833~1887)은 아버지가 귀족이었지만 사생아로 태어나 귀족 아버지의 성이 아닌 농노의 성을 따라야만 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보로딘에게 첼로 레슨 등 음
반주: 공동 창작과 해석을 통한 예술적 소통 ※ 반주자의 연습법: 곡 분석과 파트너에 대한 이해 “반주는 결국 관계의 예술이다.” 이 말은 누구보다도 반주자의 연습 방식에 그대로 적용된다. 많은 이들이 반주자는 “반주만”하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절대 아니다. 그 모든 유연함은 결국 철저한 사전 준비에서 비롯된다. 사실 반주자이기전에 피아니스트이기에, 독주곡을 연습하고 치는 게 훨씬 자유롭고 더 편하다. 무대에서 순간적으로 음악흐름을 변경할 수도 있고 실수를 해도 유연하게 대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께’ 연주하기 위한 연습은 독주자의 연습과는 다르다. 반주자는 언제나 두 사람의 음악을 상상하며 연습해야 한다. 이번 글에서는 반주자가 곡을 분석하고 파트너를 이해하기 위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 구조부터 읽어라 – 한 발 앞선 시선 반주자는 곡의 전체적인 흐름과 구조를 누구보다 먼저 파악해야 한다. 특히 리허설 시간이 짧거나 공연 당일 만나게 되는 경우, 전체적인 곡의 맥락을 알고 있는지의 여부는 연주의 완성도를 좌우한다. √ 이 곡의 형식은 무엇인가? √ 감정의 흐름은 어디서 전환되는가? √ 클라이맥스는 어디에 있으며, 어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