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흐 – 가을, 비올라 그리고 그녀
서늘한 바람에 책장을 넘기며 흔들리는 마음을 어루만지고 싶은 계절이 다가온다. 발걸음은 자연스레 서점을 향하고, 내면을 향한 진지한 대화를 준비할 책 한 권을 고른다. 바람이 반주해주고 마음이 속삭이는 대로 흥얼거리며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고등학교 시절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30년이란 세월이 흘러 한눈에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활짝 웃을 때 미소 짓는 표정에서 그녀임을 확신했다.
우리는 반가운 인사를 건네며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서로 다음 일정이 있었던 이유로 연락처를 주고받아야만 했다. 아쉬움 가득한 순간을 품고 돌아서는 발걸음에 아련함이 잦아든다.
공부를 특별히 잘하거나 다른 재능이 있어 돋보였던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를 존재감이 있었던 그녀. 조금 더 친하게 지내고 함께 모둠도 하고 싶었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그녀를 떠올리며...
잠깐 스쳤던 순간이 나의 하루를 설레게 했던 그 날의 음악을 들어 본다.
따뜻한 미소, 부드러운 말투, 그리고 그 속에 흐르는 단단함이 느껴지는 그녀와 닮은 곡은 바로 막스 브루흐(Max Bruch, 1838-1920)의 <Romance for Viola and Orchestra in F major, Op. 85>이다.
낭만적 선율과 서정적 감성이 탁월한 음악어법을 구사했던 그의 작품세계를 잘 보여주는 이 곡은 73살이 되던 해, 1911년 단일 악장으로 작곡되었다. Andante con moto, 4/4박자, 그리고 F major로 이루어진 이 곡은 전통적인 소나타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부분적으로 전통적인 5도 화음을 벗어나 반음계적 3도 관계의 사용이 구조적으로 등장하는 점에서 낭만주의적인 음악어법을 엿볼 수 있다.
<Romance for Viola and Orchestra, Op. 85>는 누군가에게 고백하듯 부드럽게 시작되는 비올라 선율이 마치 조용한 방에서 솔직한 독백을 들려주는 듯하다가 이어 오케스트라와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 곡은 폭발하는 클라이막스도, 눈에 띄는 기교도 없다. 하지만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는 듯한 애틋함, 말없이 지친 마음을 달래고픈 누군가를 위해 노래하는 듯하다.
브루흐는 1838년 독일의 쾰른(Cologne)에서 경찰 공무원 아버지와 성악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에게 첫 음악교육을 받았고 9살에 어머니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곡을 쓰게 되었다. 이후 14살에 모차르트 장학금을 받고 쾰른 음악원에 입학한 그는 1891년에 베를린 음악학교의 작곡과 교수가 되었다.
특히 이 곡이 내 마음에 다가온 이유는 그녀와 닮은 악기가 ‘비올라’이기 때문이다. 비올라는 바이올린과 첼로 사이의 중음역대 현악기로, 외형은 바이올린보다 크지만, 첼로보다는 작고, 음색은 몽환적이고 온화하다. 대중적인 주목을 받는 악기는 아니지만, 앙상블 속에서 비올라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고음의 날카로움과 저음의 깊이를 연결하며 음악 전체를 감싸주는 비올라가 한 걸음 물러나 있지만,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존재였던 그 친구와 닮은듯하다.
그리고 그녀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떠올리며 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와 리처드 라이언이 제시한 자기결정성 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성장과 발달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세 가지 심리적 욕구인 자율성, 유능성, 관계성(연결감)이 충족될 때 삶에서 높은 만족감과 의미를 경험한다고 설명한다.
타인의 시선보다 자신의 내면을 기준으로 행동한 그녀의 자율성, 자신의 강점인 부드러움으로 친구들의 유대를 강화해준 신뢰감, 그리고 타인과 부드러운 관계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교감하는 능력이 뛰어난 그녀를 떠올리며 음악 전체의 균형을 이끌고 소통을 조율하며 내면을 울리는 따뜻한 비올라의 음악이 듣고 싶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사람의 온기를 표현한 비올라와 그녀는 서로를 비추어주는 거울처럼 느껴진다. 오늘의 우연한 만남은 순간이었지만, 그 여운은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다. 세월이 흘러 각자 삶의 무늬가 깊어진 시간들에 비올라의 선율이 묵직하고 고즈넉이 깃든다. 화려함보단 진정성을 다루고 과한 표현보다는 배려의 여백을 선물하는 이 곡의 선율은 그녀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다.
소리 없이 당신의 마음을 감싸주는 사람이 혹시 떠오르나요?
고음과 저음, 독주와 오케스트라, 나와 친구 사이를 포근하게 메워주는 비올라의 음색 덕분에 추억 여행을 떠나며 따뜻한 관계 속에서 진정한 나와 조우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삶의 절정 대신 잔향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가을이 다가오는 속도로 나를 배려해준 브루흐의 로망스에 감사하며….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침묵과 침묵 사이에 있다.
-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최영민 작가
[학력]
경북대 예술대학 음악학과 석사
대구한의대 치유과학과 박사(ABD)
[경력]
전 대구과학대학출강
법무보호복지공단 대구지부 심리위원
아카데미 예송 대표
'마음이 머무는 클래식' 진행
[시상]
2024 대한민국 眞心예술대상 수상
[저서]
'마음이 머무는 클래식' (에듀래더 글로벌 출판사, 2025)
[대한민국예술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