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 막이 오르기 전의 적막은 연출가의 상상력이 현실로 변하는 임계점이다. 여기, 수백 년 전의 고전 오페라를 오늘날의 관객이 숨 죽이며 지켜보게 만드는 마법 같은 연출가가 있다. 세련된 미장센과 치밀한 텍스트 해석으로 한국 오페라계에 신선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홍민정 연출가다.
이화여대에서 불문학을 전공하며 언어의 결을 다듬고, 뮤지컬 배우로 무대 위 공기를 직접 호흡했던 그는 이제 무대 뒤에서 전체를 조율하는 ‘보이지 않는 지휘자’로 우뚝 섰다. 이탈리아 정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정통 연극과 오페라의 본질을 탐구하고, 박사 과정을 통해 이론적 깊이까지 더한 그는 명실상부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젊은 거장이다.
<리골레토>의 비극적 심연부터 창작 오페라 <안드로메다>의 현대적 감각까지, 장르와 시대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미학을 구축해온 홍민정 연출가. <대한민국예술신문>은 차가운 지성과 뜨거운 감성으로 무대를 채우는 그를 만나, 그가 꿈꾸는 오페라의 미래를 들여다보았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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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출가 홍민정 (현 오페라 및 연극 연출가) ○ 학력 및 수학 • 이화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졸업 •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전문사 오페라과 연출 전공 • 이탈리아 국립연극아카데미(Silvio d'Amico) 연출 과정 수학 • 이화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 문학 전공 박사 과정 수료
○ 주요 무대 및 경력 • 뮤지컬 <토요일 밤의 열기> 배우 데뷔 • 오페라 <목소리>,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카르멘>, <코지 판 투테> 등 연출 • 창작 오페라 <안드로메다>, <김부장의 죽음>, <텃밭킬러>, 창작 무용 <덕의 상실> <뿌리> 등 연출 • 연극<아홉수 이야기>, 창작 오페라<안드로메다> 대본 집필 • 국립오페라단, 대전 예술의 전당, 라 벨라 오페라단 등 국내 주요 단체 협업 다수
○ 예술 및 사회 공헌 활동 • 저서 <오페라가 뭐길래?> (2022) 출간을 통한 오페라 대중화 기여 • 다양한 인문학 강연 및 오페라 해설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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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재해석, 무대 위의 철학
[도입 및 소회]
최근 오페라로 쉼 없이 관객들을 만나고 계십니다. 근황과 더불어 연출가로서 느끼는 요즘의 소회가 궁금합니다.
홍민정 연출가: 몇 년 전 연달아 몇 편의 창작 작업을 하면서, 제 작업의 인문학적 기반을 더 단단히 다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최근 모교로 돌아가 박사 과정을 시작했고, 무대 연출과 병행하여 프랑스 문학이 오페라로 변용되는 과정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저 자신과 저의 세계를 차근차근 다져가는 시간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저에게 무대는 언제나 ‘질문을 던지는 장소’입니다.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는 작품들은 결국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질문들을 계속해서 고민하고, 제가 찾은 하나의 가능성을 무대 위에 풀어놓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답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관객들이 그 무대를 통해 또 다른 질문을 스스로 던질 수 있는 계기를 얻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연출가가 관객에게 어떤 답을 제시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작품과 관객 사이에 숨어 있는 질문의 연결고리를 발견하도록 돕는 가이드와 같은 역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함께 작업하는 동료들과 무대를 찾는 관객들에게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연출가로서 충분히 감사한 시간이라고 느낍니다.

[예술적 기원]
불문학 전공자에서 뮤지컬 배우를 거쳐 오페라 연출가가 되기까지, 그 여정이 매우 다채롭습니다. '연출'이라는 종착지에 다다른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홍민정 연출가: 대학 시절 불문학을 공부하며 텍스트 이면에 숨은 상징을 찾는 기쁨을 배웠고, 배우로 활동하며 무대 위 조명 아래의 고독과 열정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모든 요소 -문학, 음악, 연기, 미술-를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로 엮어내고 싶은 갈증이 생기더군요. 오페라는 그 모든 예술이 집대성된 '종합예술의 정점'이었고, 제가 가진 인문학적 배경과 현장 경험을 쏟아붓기에 가장 완벽한 그릇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유학]
이탈리아 국립연극아카데미에서의 수학 경험이 본인의 연출 세계에 어떤 미학적 토대가 되었는지요?
홍민정 연출가: 로마에서의 시간은 저에게 '전통의 무게'와 '파격의 용기'를 동시에 가르쳐주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에게 오페라는 박물관에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삶 그 자체였죠. 그곳에서 저는 완벽한 고증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 본연의 드라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정부 장학생으로서 현지 거장들의 작업을 지켜보며, 서양의 정통 문법을 익히는 동시에 그것을 어떻게 한국적인 감각으로 비틀어낼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기억이 지금의 저를 만든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학구적 열정]
이미 현장에서 인정받는 연출가임에도 박사 과정까지 수료하며 학업을 지속하셨습니다. '공부하는 연출가'로서 이론적 탐구가 실제 연출 현장에서 어떤 힘을 발휘하나요?
홍민정 연출가: 연출은 단순히 감각만으로 하는 작업이 아니라, 결국 ‘설득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대 위의 의자 하나, 조명의 색깔 하나에도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필요합니다. 대학원에서의 연구는 제 연출적 직관에 단단한 뼈대를 세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역사적 맥락과 이론적 토대가 견고할 때, 무대 위에서의 새로운 시도나 파격도 비로소 설득력을 갖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연출은 가수나 스태프들과 동등한 예술가이면서도, 동시에 작업의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함께하는 동료들부터 무대를 찾는 관객들까지 설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연출가 스스로가 견고한 확신 위에 서 있어야 하죠. 그런데 이런 자기 확신은 결국 끊임없는 공부를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부족한 스스로를 알기에 오늘도 공부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렇게 해서 함께하는 동료들에게는 믿음직한 선장으로, 관객에게는 좋은 질문을 던지는 연출가로 남을 수 있다면 그것만큼 큰 보상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음악 속의 드라마를 시각화하다
[음악적 해석]
"연출가는 보이지 않는 지휘자"라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소리가 아닌 시각적 언어로 음악을 지휘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포인트는 무엇입니까?
홍민정 연출가: 오페라에서 모든 답은 '음악'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곡가가 특정 대목에서 왜 이 악기를 썼는지, 왜 이 화성을 택했는지를 파고들다 보면 인물의 숨겨진 욕망이나 공포가 보입니다. 저는 그 음악적 에너지를 무대 동선이나 시각적 오브제로 치환하는 역할을 합니다. 음악이 흐를 때 무대 위의 공기가 그 선율의 온도와 일치하게 만드는 것, 관객이 귀로 듣는 것을 눈으로도 동시에 체험하게 만드는 것이 제 연출의 핵심입니다.

[미장센의 미학]
홍 연출가님의 무대는 미니멀하면서도 상징성이 강하다는 평을 받습니다. 본인만의 무대 미학을 정의하신다면요?
홍민정 연출가: 저는 비교적 절제된 공간을 두되, 그 공간을 인물의 움직임으로 채우는 무대를 좋아합니다. 화려한 장치로 무대를 가득 채우기보다는 비어 있는 공간 속에서 인물의 동선, 몸의 움직임, 조명과 영상이 함께 어우러지며 하나의 장면을 만들어가는 방식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특히 작품 안에서 몇 개의 상징적인 장면을 또렷하게 만들어 두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정해진 동선과 조명 속에서 인물들이 정확한 순간에 정확한 위치에 서며 만들어내는 장면들은, 제가 작품을 통해 던지고 싶은 질문의 방향을 시각적으로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장면들을 정확하게 만들어내기 위해 때로는 일반적인 작업보다 조금 더 많은 연습량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완성된 장면이 무대 위에서 힘을 발휘하는 순간을 보면, 함께한 동료들도 자연스럽게 그 과정을 이해해 주셨던 것 같습니다.

[저술과 소통]
저서 <오페라가 뭐길래?>를 통해 대중과 만나셨습니다. 연출가가 생각하는 '오페라를 가장 잘 즐기는 법'은 무엇일까요?
홍민정 연출가: 오페라를 가장 잘 즐기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먼저 ‘오페라는 어렵다’는 편견을 내려놓고 한 번 접해보는 것, 그리고 공연을 보기 전에 작품에 대해 조금만 알아보고 오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모든 걸 알고 오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오페라는 분명 알수록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장르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사람들에게는 오페라만한 블록버스터가 없었기에, 그저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훨씬 더 자극적인 콘텐츠들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오페라의 재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앎과 훈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해 미술관의 도슨트처럼 오페라도 누군가 친절하게 팁을 주고 가이드를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말씀하신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제 책이 그런 작은 가이드가 되어, ‘앎으로써 더 잘 보이고 더 잘 들리는’ 오페라의 세상을 좀 더 많은 관객들과 함께 나눌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미래를 향한 무대, 연출가의 사명
[교육과 후학]
대학 강단에서 후학들을 양성하며 강조하는 '연출가의 덕목'은 무엇입니까?
홍민정 연출가: 제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깊은 호기심’입니다. 좋은 연출가는 기술적인 무대 운영 능력 이전에, 인간의 다채로운 내면을 들여다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출은 혼자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작품 속 인물들을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실제 작업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연출가는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보고 나누며 만들어가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학생들에게 늘 말합니다. 결국 연출은 ‘사람 공부’라고요.

[새로운 도전]
늘 새로운 도전과 성취를 이루시는 분으로서 새로운 장르 특히 뮤지컬이나 연극 등으로 확대하실 계획이 있으신가요?
연극 분야에서는 오래전에 <아홉수 이야기>라는 작품을 집필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후에는 소극장 오페라의 각색과 연출을 맡기도 했고, 창작 오페라 <안드로메다>의 대본을 쓰기도 했습니다.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창작 작품을 쓰는 작업을 계속 이어가고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이야기를 무대 위에서 풀어내는 일은, 오랜 전통을 가진 작품에 현대적 시각을 더해 관객과 소통하는 작업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연출자가 직접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작품을 구상하고 구현하는 과정에서 큰 장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처음 무대 공연을 뮤지컬 배우로 경험하면서 공연 예술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이후 조연출 시절을 거치며 뮤지컬과 연극 등 다양한 장르를 경험했고, 지금도 오페라뿐 아니라 무용이나 음악극 등 여러 형태의 공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앞으로도 오페라에 국한되지 않고 뮤지컬이나 연극 등 다양한 장르의 작업에 열려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장르의 구분 자체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각 장르를 완성하는 사람들과 작업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 장르의 특성과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연출은 결국 혼자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완성해 가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 장르를 경험해 온 것이 제게는 오히려 큰 장점이 되었습니다.
처음 오페라 연출을 했을 때 가수들에게 ‘뮤지컬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안무처럼 움직이는 동선이 많아 가수들에게 낯설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뮤지컬 같다’, ‘연극 같다’, ‘오페라 같다’라는 경계가 반드시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연출적 방향성과 타당성이 있다면, 각 장르가 가진 장점을 서로 흡수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마무리 인사]
마지막으로 홍민정의 무대를 기다리는 관객들과 대한민국예술신문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홍민정 연출가: 오페라는 수백 년의 시간을 견뎌온 인류의 보물창고와 같습니다. 저는 그 창고의 문을 열어 오늘을 사는 여러분께 가장 빛나는 보석을 꺼내 보여드리는 광대이자 안내자가 되고 싶습니다. 때로는 날카로운 통찰로, 때로는 따뜻한 위로로 여러분의 삶에 닿는 무대를 만들겠습니다. 앞으로도 무대라는 마법의 공간에서 여러분과 더 깊게 소통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에필로그]
인터뷰 내내 홍민정 연출가의 눈빛은 무대 위의 조명보다 더 뜨겁게 빛났다. 불문학도의 섬세한 감수성으로 텍스트를 해체하고, 배우의 심장으로 인물을 숨 쉬게 하며, 연출가의 냉철한 지성으로 무대를 완성해가는 그. 그는 단순히 극을 올리는 사람이 아니라, 시대와 호흡하는 새로운 고전을 창조해가는 예술가였다.
박사 과정을 거치며 다져진 학구적인 깊이는 그의 연출이 단순한 파격에 머물지 않고 묵직한 울림을 주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음악 속에 숨겨진 드라마를 찾아내어 관객 앞에 펼쳐 보이는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홍민정이 지휘하는 시각적 오케스트라는 앞으로도 우리 오페라계를 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수놓을 것이다. 그가 열어젖힐 다음 무대의 막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편집자 주]
*사진자료제공: 홍민정
[대한민국예술신문 최영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