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로딘 – 아내를 위한 사랑의 선율
갑작스러운 소나기와 큰 울림의 천둥소리에 놀라 가슴을 쓸어내리던 중 한 통의 전화가 울린다. 바로 상담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는 중년남성의 목소리가 간절하게 떨렸다. 그의 아내가 자궁암이라며….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이는 듯했다.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의 초등학교 선생님인 아내는 날마다 즐거운 사람이었죠. 그런데 건강검진 받은 후 암이라는 말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게 이런 거구나”라며 그날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운동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과도 잘 어울려 평생 몸도 마음도 건강할 것만 같았던 아내가 수술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그동안 남편으로서 나는 어땠나? 뒤돌아보니 잘한 것이 하나도 없더라’라고 한다.
“아내가 음악을 좋아하는데, 함께 들으며 이야기 나눌 만한 곡이 없을까요?”
그분에게 권해드린 곡은 보로딘(BORODIN) 현악 4중주 2번 D장조 (String Quartet No. 2 in D major) 3악장이다.
작곡가 알렉산드르 보로딘(1833~1887)은 아버지가 귀족이었지만 사생아로 태어나 귀족 아버지의 성이 아닌 농노의 성을 따라야만 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보로딘에게 첼로 레슨 등 음악교육을 시켰다. 보로딘은 9살에 폴카를 작곡하고 13살에 플루트 협주곡을 작곡할 만큼 음악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나 음악은 취미였다. 그는 화학 쪽에 관심이 많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의과대학에서 화학과 의학을 전공하였다. 교수로 재직하던 중에 러시아 5인조의 지도자인 발라키레프에게 작곡을 배우고 곡을 쓰게 되었다.
명망 있는 화학자이자 교수로 평일에는 연구와 강의에 몰두하고, 주말이나 휴일에만 작곡했다. 그리고 그는 아내가 병약하여 병간호를 해야 했고 틈틈이 시간을 내어 작곡한 탓에 자신을 스스로 ‘일요일의 작곡가(Sunday Musician)’로 칭하기도 했다.
1881년은 그가 아내와 결혼 20주년을 기념하여 이 곡을 선물했다. 이 작품은 보로딘이 아내를 향한 낭만적인 연애편지이자 사랑의 다짐이라 볼 수 있다.
3악장 녹턴: 안단테(Nocturne: Andante)는 서정성이 뛰어난 야상곡으로, 특히 첼로의 로맨틱한 선율이 돋보인다.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싱코페이션 반주를 배경으로 첼로가 주선율을 연주하며 시작한다. 이 선율은 여러 악기로 반복되고 발전된다. 이후 첼로와 바이올린이 서로 사랑의 대화를 주고받듯 포근하고 따뜻한 선율이 오고 간다. 부부간의 깊은 사랑과 유대감을 악기 소리에 담아 표현한듯하다.
3주 뒤 다시 전화가 왔다. 아내에게 이 곡을 들려주며 작곡가가 이 작품을 작곡하게 되었는지 부부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표현하는 시간을 가졌다며 그의 목소리에서 상기된 표정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수술 후 요양병원에서 치료를 잘 받고 있어 회복이 빠르다며 아내가 좀 낫고 나면, 감사 인사를 전하러 오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기분 좋은 전화를 받고 나니 힘이 나는 듯하다. 클래식 음악은 다양한 과정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음악의 조화로운 선율과 리듬은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게 하고 안정시켜주기도 한다. 그리고 불안과 우울증을 완화하고 긍정적인 감정을 유도하는 효과가 있다.
음악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잠재된 내면의 문제들을 음악 속에서 표현하게 돕는다.
두 사람의 간절한 마음을 함께 하며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말이 생각난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줄을 안다.
날이 따뜻할 때는 모든 나무가 푸르러 구분하기 어렵지만, 겨울이 오면 진짜 푸름을 지닌 나무만이 살아남는다고…. 역경과 시련이 닥친 후에야 진정한 가치와 본성이 드러난다는 이 글은 우리 삶의 통찰과 마주하는 말인듯하다.
부부가 서로 어려울 때 따뜻하게 내민 손길과 말들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힘과 용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모진 비바람과 뜨거운 햇살을 견뎌내는 두 사람의 사랑은 깊고 풍요롭게 익어가고 있다. 아내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과 지지를 전달하고자 노력하는 남편분은 ‘나는 당신을 깊이 사랑하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라는 마음을 음악과 함께 표현하고, 아내는 남편에게서 큰 위로와 사랑을 확인하며 삶에 대한 희망과 용기가 생길 것이다.
부부의 완숙한 사랑과 아내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며 누군가에게 음악의 힘은 또 그렇게 전해지고 있었다.
최영민 작가
경북대 예술대학 음악학과 석사
대구한의대 치유과학과 박사(ABD)
전 대구과학대학출강
법무보호복지공단 대구지부 심리위원
아카데미 예송 대표
'마음이 머무는 클래식' 진행
2024 대한민국 眞心예술대상 수상
저서 '마음이 머무는 클래식' (에듀래더 글로벌 출판사, 2025)
[대한민국예술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