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공예는 기다림과 인내의 예술이다. 은판 하나가 온전한 찻잔이 되기까지 작가는 수만 번의 망치질과 정교한 땜질을 견뎌내야 한다. "금속은 잡념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유영선 명인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오직 금속이라는 한 우물만을 파온 전남의 대표적인 공예 장인이다.

그의 작업은 독창적이다. 담양의 상징인 대나무를 금속과 결합하고, 전통 옻칠과 민화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해 ‘한국적 금속공예’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최근 광주 예술의 거리에서 선보인 전시는 그가 걸어온 인고의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보였다.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차가운 금속을 다독이며 일상의 예술을 실천하고 있는 유영선 명인. 공방 이름처럼 세상에 따뜻한 햇살을 ‘해드리고’ 싶다는 그의 삶과 예술 철학을 10가지 질문에 담았다.
[편집실]
1. [공예의 가치] 일상을 예술로 바꾸는 ‘쓰임’의 미학
Q. 명인님께서는 공예가 박물관 유리 뒤에 갇힌 유물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숨 쉬는 존재'여야 한다고 강조해 오셨습니다. 명인님이 생각하시는 공예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요?
[답변] "공예의 진정한 가치는 '쓰임'과 '아름다움'의 완벽한 결합에 있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작품이라도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고 장식장에만 있다면 그것은 절반의 생명력만 가진 것이라 봅니다. 찻잔 하나를 들었을 때 느껴지는 적당한 무게감, 입술에 닿는 은의 감촉,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차의 온기가 어우러지는 순간 비로소 공예는 완성됩니다. 일상을 예술로 바꾸는 힘, 그것이 제가 40년 넘게 공예의 길을 걷는 이유입니다.“

2. [창작 철학] 차가운 금속에 불어넣는 ‘삶의 온기’
Q. 흔히 금속은 차갑고 단단한 물질로 인식됩니다. 하지만 명인님의 작품은 '따뜻함'과 '유연함'이 느껴진다는 평이 많습니다. 차가운 금속에 작가님만의 '온기'를 불어넣기 위해 가장 공을 들이는 지점은 어디인가요?
[답변] "금속은 성질이 강하지만,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다스리느냐에 따라 표정이 달라집니다. 저는 은판을 수만 번 두드리는 과정에서 그 금속이 가진 거친 기운을 다독인다고 생각합니다. 직선보다는 부드러운 곡선을 살리고, 은의 맑은 빛에 옻칠의 깊은 색감을 더하는 과정이 바로 '온기'를 입히는 작업이죠. 제 손의 열기와 망치질 소리가 금속 안으로 스며들어, 사용하는 분의 마음까지 데워줄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작업에 임합니다.“

3. [제작 과정] 망치질과 땜질, 정직한 노동의 시간
Q. 금속공예를 '수만 번의 망치질을 반복하는 인내의 예술'이라 정의하셨습니다. 잡념이 섞이면 금속이 금방 반응한다는 말씀이 인상적인데, 실제 작업 중 몰입의 순간은 어떤 경험인가요?
[답변] "망치질은 저에게 정직한 수행과 같습니다. 일정한 리듬으로 망치를 휘두르다 보면 어느 순간 망치 소리와 제 호흡이 하나가 되는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지곤 합니다. 그때의 금속은 더 이상 딱딱한 물질이 아니라 제 손길에 따라 유연하게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느껴지죠. 그 몰입의 시간을 통과해야만 표면이 매끄럽고 기운이 맑은 작품이 탄생합니다.“

4. [재료의 융합] 담양의 대나무와 은의 운명적 만남
Q. 담양의 대나무 뿌리를 은제 다구에 접목한 시도는 명인님만의 독보적인 시그니처입니다. 전혀 성질이 다른 두 재료를 결합했을 때의 미학적 시너지는 무엇인가요?
[답변] "은(銀)은 깨끗하고 살균 작용이 뛰어나지만 열전도가 너무 빠르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반면 담양의 대나무 뿌리는 자연의 거친 질감을 지녔으면서도 뜨거운 열을 막아주죠. 이 두 재료의 만남은 실용적인 해결책인 동시에,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완벽한 화합을 상징합니다. 찻물을 부었을 때 손끝에 닿는 대나무의 촉감은 차를 마시는 사람에게 자연의 평온함을 직접 전달하는 매개체가 됩니다.“

5. [전통의 재해석] 은판 위에 피어난 옻칠과 민화
Q. 은잔 표면에 옻칠을 하고 사군자나 민화를 그려 넣는 작업은 마치 금속 위에 그림을 그리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런 시도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신가요?
[답변] "우리 전통 민화에는 해학과 삶의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은잔이라는 작은 공간 안에 사군자의 기개나 민화의 따뜻한 정서를 담아냄으로써, 한국적 미감의 정수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금속공예가 단순히 금속을 다루는 기술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정서와 문화를 담아내는 그릇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6. [작품의 주제] 금속 속에 흐르는 ‘시간의 흔적’
Q. 2024년 전시 주제였던 ‘금속 속에 흐르는 시간’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40년 외길을 걸어오시면서 작품 속에 담고 싶었던 ‘시간’의 의미는 어떻게 변화해 왔나요?
[답변] "젊은 시절에는 완벽한 형태를 만드는 데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봅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빗살무늬 작업들은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감각을 잇는 시도였습니다. 이제 제게 금속공예는 멈춰있는 오브제가 아니라, 누군가의 일상 속에서 함께 나이 들어가며 삶의 흔적을 담아내는 유연한 기록입니다."

7. [열정의 초심] 충장로 금은방에서 배운 집념
Q. 대학 시절, 현장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충장로의 금은방들을 일일일 찾아다니셨던 일화가 유명합니다. 그 시절의 간절함이 현재의 명인님께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요?
[답변] "그때는 문전박대를 당하면서도 배움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이론을 배웠다면, 현장에서는 금속이 불길 속에서 어떻게 변하는지를 몸으로 익혔죠. 그때 길러진 '기초 체력'과 '포기하지 않는 근성'이 40년 세월을 버티게 한 원동력입니다. 지금도 작업이 막힐 때면 그때의 간절했던 초심을 떠올리며 다시 망치를 잡습니다.“

8. [공간의 의미] 공방 ‘해드리움’에 담긴 진심
Q. 담양 담빛길의 공방 ‘해드리움’은 작가님께 어떤 공간인가요? 이름에 담긴 뜻처럼 대중에게 어떤 공간으로 기억되길 바라시나요?
[답변] "‘해드리움’은 ‘해가 들어온다’는 뜻과 무언가를 ‘해드린다’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무아지경에 빠져 작업하며 느끼는 행복이 작품을 통해 손님들에게도 전달되길 바랍니다. 문턱을 낮추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차가운 금속에서도 따뜻한 햇살 같은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랑방 같은 공간이길 꿈꿉니다."

9. [명인의 책임] 후학 양성과 공예의 지속 가능성
Q. 담양군 공예명인으로서 후배 공예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계십니다. 공예가의 길을 걷는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답변] "공예는 머리가 아닌 정직한 손노동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교는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지만, 작품에 담긴 정성은 숨길 수가 없습니다. 조급해하지 말고 금속과 대화하는 시간을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 정직한 시간이 쌓여야만 비로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이 나옵니다."

10. [미래의 비전] 마지막까지 망치를 놓지 않는 현역
Q. 앞으로 명인으로서 꼭 이루고 싶은 마지막 목표나 소망은 무엇인가요?
[답변] "거창한 목표보다는, 제가 떠난 뒤에도 제 작품이 누군가의 찻상 위에서 소중하게 쓰이며 '참 따뜻한 작품이다'라는 기억으로 남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명인이라는 타이틀에 안주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망치 소리가 멈추지 않는 공방을 지키는 '현역 작가'로 남고 싶습니다. 제 망치질이 누군가의 삶에 작은 위로가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대한민국예술신문 ]



